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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ROMA 마지막 장면 [스포일러]

<로마(ROMA 2018, Alfonso Cuaron)> 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역시 마지막 부분이다. 거대한 물결이 거칠게 넘실 거리는 바다로 위태롭게 전진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는 담담하게 담아낸다. 어떤 장면전환이나 청각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굉음없이 있는 그대로.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군더더기 없이 생을 보여주는 것. 그 덕에 이 장면은 더욱 아슬아슬하며 잔인하게 느껴진다.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위기 속에는 여러 인물들의 운명이 달려있다. 첫째로 선량한 아이들의 목숨이다. 깊은 곳에 가서 놀면 안된다는 엄마의 말을 어기긴 했지만 그 댓가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양육권자의 다툼과 이혼을 겪은 아이들이 가족의 행복을 되찾기 위한 여행에서 생을 잃는 이야기는 너무도 잔인한 동화다. 희생자는 또 있다. 배우자의 외도로 정신적 고통과 결혼생활의 종말,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맞은 소피아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 본디 직업인 생화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출판사에 취직하기로 선택한 그녀는 이른바 '경단녀' 이다. 그런데 만일 아이들까지 바다가 삼켜버렸다면 어떨까. 그보다 더 우울한 드라마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위기에 운명이 걸린 또 한 사람은 돌봄 노동자로써, 어른으로써, 한 인간으로써 이 아이들을 돌볼 의무를 지닌 입주가사도우미 클레오의 미래다.


다행히도(?) 소피아는 거센 바다 속에서 아이들을 구출해낸다. 그리고 해변에서 소피아와 아이들, 클레오는 감동적인 재회를 맞는다. 그 자체만으로로 훌륭한 단편영화인 이 마지막 단락처럼 영화는 고통받는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이며, 거기에 70년대 멕시코의 시대적 배경을 가미함으로써 감독의 자전적 초상을 완성한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으레 듣게 마련인 다른 사람의 무용담, 살아온 이야기들이 늘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로마>는 다르다. 과장없이 정갈하고 차분히 말한다. 그 때 그들을 그랬으며 나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고. 만일 누군가 자서전을 쓰거나 영상으로 과거를 남기고 싶은데 참고할 만한 작품이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 [로마]를 추천하고 싶다. 


클레오는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낳지만 유산하고 만다. 원인이 무엇일까. 임신 소식을 듣고 떠나버린 남자친구의 행동, 그런 페르민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자리에서 페르민이 곤봉을 휘두르며 외친 고함, 가구 매장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시위대를 죽이려는 우익무장단체 소속 페르민. 되짚어 보니 모두 페르민으로 연결된다. 클레오의 남자친구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까. 슬픈 현실을 뒤로 하고 클레오는 바다로 성큼 성큼 걸어간다.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조금씩 화면을 채우는 물덩어리, 귀 속을 가득 채우며 부서지는 소리 가장 긴박한 순간에 카메라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제 해변에 가면 종종 물에 젖어 기진맥진 한 채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는 클레오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바다는 모든 것을 짐어 삼키는 참혹한 현실이며 심지어 그 해수면이 해가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배경이 된 시점인 1971년 멕시코 <성체 축일 대학살>은 영화 <1987>을 떠올리게 한다. 버스 위에 올라서 광장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닮은 구석 없어 보이는 두 영화가 겹쳐 보이는 이유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의 개인의 삶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1987>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각각의 주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명했다면, <로마>는 암단한 현실 속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과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 연대의 힘까지 자연스레 연결지어 뭍으로 끌어냈다. 


최근 느끼는 새로운 갈증은 무수한 사회 현안들에 대해 제기되는 해법들 중에 시민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언급이 더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경제 주체는 셋이다. 정부, 기업, 가계. 정부는 재정과 정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은 투자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또 혁신을 통해 경제활동을 활성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계는? 이러한 질문과 답을 찾기가 쉽진 않다. 담론 자체가 거시적이며 그 아래에는 시민사회의 역할을 미미하다 여기는 논리가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문제해결에서 이런 현상 들을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꽃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무수한 투쟁과 희생, 세월이 들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런 인류의 역사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2019년에 이르러 정말 말 그대로 모두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다. 일부 기업에서 임금을 볼모로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는 경우가 아직 있지만 개인의 의지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하여 이제는 투표를 '출석'이라 부르고 싶다. 투표는 최소한의 행위이며 그 후의 결정과 판단이 핵심이다. 


<로마>가 던진 화두 '연대'.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거친 바다로 뛰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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