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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MAN BOX 후기




맨박스, 십계명


남자는 울지 않는다.


남자는 분노 이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는 쫄지 않는다.


남자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남자는 약한 것들을 보호한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


남자는 여자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게이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한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흘렀다. 세 번 읽었으며 일주일 간 후기를 준비 했는데 파일이 날아갔다. 그래서 그냥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적는다. 행복하다. 이 책은 가정폭력, 남성에 의한 폭력의 원인을 맨박스에서 찾는다. 맨박스는 남성성을 규정하는 틀이며 집단사회화교육을 통해 대대로 이어지며 대부분의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공유하거나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남성중심적 인식체계다. 위의 십계명은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미디어나 일상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문화, 언어, 행동양식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맨박스를 발견할 수 있다. 만연한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가정폭력의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닌 [평범한 남성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가해자들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이웃인 나머지 [선량한] 남성들이 남성 중심주의와 거기에서 비롯된 남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문제의식이다. 또한 맨박스의 명제들이 남성들의 진정한 주체적 삶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남성 중심주의의 해체는 남성의 행복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 나아가 모든 젠더에 해로운 남성 중심주의는 어째서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걸까. 

때린 사람. 맞은 사람. 같이 때린 사람. 때리려다 만 사람. 때리는 걸 도와준 사람. 때리는 걸 본 사람. 때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 때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은 사람. 때린 사람의 부모, 선생, 직장동료, 이웃, 친구. 그리고 이어지는 묵인, 방조, 외면. 가정이나 거리에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선량한] 남성들에게 이 책은 말한다. 왜 말리지 않았는가. 왜 이웃의 여성이 비명을 지를 때 문을 두드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나. 보통의 경우 불이 나면 그 자리에서 망설임없이 119에 신고한다. 이 책이 바라는 것은 [선량한] 남성들이 다른 [남성의 폭력]에도 [화재]의 경우처럼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남성 중심주의]는 [불]만큼 파괴적이다. 그 문화를 공유하거나 확대 재생산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이상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토니포터는 말한다.

책은 폭력남성과 [선량한] 남성을 중심으로 전개 되지만 실제 남성 중심주의는 남성에 의해서만 공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문화와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인식이기에 소노여남 누구나 남성 중심주의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설령 남성 중심주의에 동의하는 여성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남성 중심주의의 당위성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단지 그 문화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전파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현상이자 결과에 불과하다. 이는 남, 녀 주체 간의 대결이 아닌 인권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젠더 혹은 그 일부가 그릇된 문화와 인식을 수용한다 한들 문제점이 사라지거나 용서되지 않는다. 

이 책은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가 자신의 경험과 활동을 바탕으로 미국사회를 분석해 쓴 책이다. 현재 한국의 온, 오프라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최근의 페미니즘 논의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화장실 몰카, 미투운동, 데이트 폭력, 탈코르셋. 매스컴에서 다뤄지는 이슈는 주로 공공장소나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이거나 개인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남성 중심주의의 핵심은 사실 가부장제에 있으며 그 출발은 가정이다. 맨박스는 바로 이 가정 내에서의 폭력과 남성성의 사회화를 지적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어떤 현실을 만들어 놓을 것인가. 연쇄살인범들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학대를 받거나 학대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가정 내의 폭력은 그 특성상 외부로 드러나지 않으며 심한 경우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지 마라' , '사생활 침해' 등을 명목으로 방관되어 온 수 많은 폭력들은 결국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의 충실한 밑거름이 되어 왔다. 자신의 삶을 육아, 공장노동, 가사노동 등에 바쳤던 여성들은은 '나처럼 살지마' 라 가르쳤고 자손들은 비혼주의와 딩크(Double Income No Kids)를 택함으로써 그에 응답하는 중이다. 

출산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것이 거시경제와 GDP, 국가 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는 부차적 문제이며 핵심은 누구나 원한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환경을 사회가 충분히 조성했는가에 있다. 주거문제, 과도한 결혼식 비용, 가사노동 분담 등이 개선되면 결혼은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며 공동육아, 사교육비 절감과 같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당연히 출산율도 오르게 된다. 저출산 대책이라며 출산율 수치를 올리기 위해 100조 이상의 돈을 들여 집행된 정책과 제도들이 무색하게 2017년 합계 출산율은 1.05명 으로 역대 최저다. 출산율 역시 목표나 목적이 아닌 현실을 진단하는 수단일 뿐이다. [맨박스]에서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의 딸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길 원합니까'. 성별 임금격차와 유리천장, 독박육아의 위험까지 안고서 출산의 위험을 감수할 여성은 많지 않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또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다. 출산과 육아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기적이 아니며 나라와 기업을 위해 충실한 노동자를 생산하는 행위 또한 아니다.  

[맨박스]의 저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연대하는 삶이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착하다, 친절하다, 예의바르다, 문제없다, 교양있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뭇 남성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어려운 요구일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남성 혹은 남성 중심주의를 받아들인 시민들은 군부독재, 유신정권, 5공화국, 일제강점, 교련 등 오랜 기간 수직적 사회를 겪으며 살아왔다. 강자와 약자 간의 위계를 양분삼아 자라는 남성 중심주의에게 한국 사회는 너무나도 훌륭한 터전이지 않았을까. 또한 대한민국의 남성은 20대에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한다. 사회와 이웃, 보호자로 부터 남성 중심주의를 충실히 계승받은 남성들은 여러 사회기관 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몸과 마음에 남성성을 새긴다. 

책은 잘 읽힌다. 개념이나 용어, 이론의 소개없이 대부분 글쓴이의 주관과 경험, 그리고 다른 남성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내용을 전개한다. 대전제인 남성 중심주의, 맨박스, 그에 기반한 사회적 현상과 문화 그리고 그 이론에 대해 생기는 의문들은 책 내용만으로는 풀 수 없다. 하여 배경지식이 있다면 훨씬 읽기가 수월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다. 독자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아마도 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 삶을 지적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진짜 남자] 그리고 [선량한 남자]들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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