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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82년생 김지영

2016 조남주 소설




본문에 책의 내용/분위기/결말 등이 직,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충돌


내가 확신하고 있던 것이 정면으로 반박당하거나 의심을 살 경우 억울함과 답답함에 화가 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대단한 에너지가 소비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 가치관, 아무 걱정없이 오랫동안 인생의 준거로 삼아온 사상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한 주장일지라도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 행동양식, 누려온 문화, 이루어 왔던 모든 것, 앞으로 성취하게 될 어떤 것 등이 전부 부정당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운다. 믿을 수 없다. 내가 틀렸을 리가 없다. 말도 안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건 아니야. 그럼 지금까지 내가 나쁘게 살았다는 뜻이야.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난 괜찮게 살아왔어. 그런데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만남


노회찬 의원이 김정숙님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했으며 얼마 전 레드벨벳 아이린이 읽었다는 사실 화제가 됐었던 [82년생 김지영] 을 읽었다. 2016년 10월 14일 출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잠시 미뤄 두었던 이유는, 한국의 현실에서 용기있게 여성 젠더를 짊어지고 가는 분들 그리고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하더라도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생존하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미리 접했기 때문이다. 해서 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나는 충분히 한국 여성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함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불현듯 그래도 한 번 들여다 보자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에 책장을 폈다. 쉽게 읽힌다.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3시간 만에 다 읽었다. 과한 욕심을 내지 않은 문장들이 굉장히 담백하며 명료한 이야기 구조 또한 복잡한 사고를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논쟁적이며 씁쓸한 뒷 맛을 남긴다. 먹을 땐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가지만 막상 뱃 속에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어딘가 시원치 않은 느낌이랄까.  


본문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과 그들의 삶을 낱낱이 드러낸다. 대부분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된 김지영 씨의 어머니, 할머니, 언니 등 등장인물들이 생활 속에서 겪는 일상들,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이자 본질이다. 화려한 문체, 거창한 설정 등은 없지만 들숨부터 날숨까지 생활 전반에 깊숙히 녹아있는 차별과 억압, 구조적인 모순들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어느 소설보다 숨막히는 압박감을 선사한다. 책을 덮고는 소설이 김지영 씨와 같은 30대 여성들에게 조용한 연대와 격려의 손길을 내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30대였던 그리고 30대가 될 모든 여성들에게도 큰 공감을 샀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일부 여성 인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일부 독자들에겐 불편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가장, 어리광 부리는 막내, 이율배반적인 의사 등 소설 속 남성의 모습은 여성에 비해 부족한 인간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떠올리곤 하는, 왜 여성의 주장만 하느냐, 남자도 힘들다, 편가르려 하지 마라, 등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심지어 여성인권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너무 화가 나서 읽기 어려웠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생각들과 불편한 감정들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남성들 그리고 여타 인권에 관심이 없었던 분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성인권의 향상이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여성 인권은 기본권의 문제이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 구성원이 고통을 호소하며 변화를 요구할 때에,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감하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물음에도 맞닿아 있다. 결국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읽고 싸우고 듣고 대화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나의 경우


여성 인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때로는 쉽고 또 때로는 어렵다. 분명한 한 가지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점이다. 지나온 내 삶 깊숙한 곳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과 못된 언어와 무지와 외면과 무의식적인 또 의식적인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는 유치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 반면 내가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때는 20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 사실을 되짚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몰랐다, 배우지 않았다 라는 말로 지난 날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자각없이 살아온 시절이 얼마나 길었는지 또 스스로 모순을 깨닫는 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곱씹어보며 반성하기 위해서다. 여자친구를 통해서 처음 여성의 삶 그리고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무감각함에 소름이 끼쳤다. 왜 몰랐을까. 늘 지하철을 타면서, 밤길을 걸으면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욕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심지어 같이 눈물도 흘렸었는데 왜. 화장실에서 교실에서 거리에서. 어떻게 하나도 몰랐을까. 


나는 스스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선 반드시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라 결론을 내렸다. 다른 분들은 어떤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특별히 학습하지 않거나 스스로 들여다 보려 공들이지 않으면, 타인의 삶 속에 존재하는 아픔은 결코 느낄 수 없었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눈빛과 비명과 외침과 절규와 속삭임과 주장들을 접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늦게나마 조금씩 배움을 시작했고 다시 부족함을 깨닫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리고 생활속에서 당사자들을 만나거나 관련 자료를 통해 알아보면 여성을 비롯한 타인과 소수자에 대해 내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많은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 사상,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경험상 대단히 위험하며 때로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자칫 자존심과 영혼에 깊은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절대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비명도 새어나올 것이다. 표현이 좀 과격한 것 같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고 난 후에야 여성의 삶에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었다. 괴롭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전하고 싶은 개인과 사회에게 학습, 갈등과 토론, 그리고 합의의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 



각개전투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늘 그렇다. 지금까지 여성 인권 뿐 아니라 사회 각 부분의 엄청나게 많은 문제제기와 자성의 목소리와 약자들의 호소와 공감의 목소리와 뒤늦은 미디어의 비판 그리고 구조와 시스템의 반복, 대물림을 목격해왔다. 신자유주의의 바다 위에서 힘겹게 표류하는 소시민에게 쉽지 않겠지만,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불합리, 불공정 특히 '나' 자신이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물러서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면 노무사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사장을 고발해야 하고, 직장에서 야근수당을 주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성별을 불문하고 성희롱, 성폭력을 행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제재를 가하는 게 가장 좋다. 실제의 삶에서 이렇게 행동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여러 이유로 많은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인권과 연대의식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모두 자기만의 생존법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전략과 전술이 모여 끝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추천


학생인권 문제의 경우 핵심 주체는 학생과 학교, 학부모, 교육계 공무원 정도가 될 것이다.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동자, 사업자, 정부의 3주체가 모여 협의한다. 수 십년 간 이어져 온 동북아시아의 '핵'심인 북핵문제는 결국 정상회담, 3자 4자 6자회담, UN의 중재 등으로 해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를 성별로 양분하여 분석하려 들면 무수한 하위 개념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방대한 양의 자료와 정보를 배경지식으로 요구하게 된다. 여성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시민의 시각에서 판단해보자면 근래에 여성인권과 관련된 오해들은 비전공자가 소화하기에 지나치게 넓은 영역과 그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과장하면 모든 영역의 여성과 남성이 각자 자기만의 주장을 펼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여성인권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대단히 까다로우며 또 격렬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그 문제가 다루는 영역이 대단히 방대하며, 그에 따라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들이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는 데다가, 문제의 본질을 짚고자 하면 남성과 여성이 존재했던 아주 오랜 인류의 역사부터 되짚어 보아야 하는 아주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방대한 이론과 지식을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우선 실제 생활에서 맞딱 들이는 상황부터 시작해서 하나 하나 짚어가려 한다. 총론보다 각론을 먼저 익히는 전략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성인권에 접근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이 책, [82년생 김지영]을 적극 추천한다. 그 어떤 이론서보다도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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