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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범 <실망시키지 않는다>





구하라를 구하라


‘구하라를 구하라’ 지나가는 이야기, 그저 우스갯 소리로 여기던 이 말. 이제 빚이 되어 가슴에 맺힌다. 구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왠지 아는 사람 같기도 하다. 으레 그렇듯 그 날 이후 수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몇 가지 사실들을 새로이 알았다. 깊이 알지 못했던 일들도 다시 봤다. 최종범, 폭행, 무죄판결, 5월에 있었던 시도, '정준영 단톡방 사건' 취재 기재에게 직접 접촉한 일, CCTV. 많은 의문과 추측이 생겨난다. 이랬겠지, 저랬겠지, 맞아 그런 심정이었을거야, 상념과 사고실험으로 시간을 꽤 보낸 후에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타살' 이란 말이 있다. 그의 입장에서 '사회'의 일부인 나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 걸까. 


학교에서 스무살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원인은 동료 학생의 성폭행. 마침 휴학중이었던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면죄부를 받았다. 가족, 친구, 애인, 옆 집, 친척 어디까지가 '우리' 이고 '남' 이며, 죽거나 다쳐도 슬퍼해야 할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는 지 모르겠다. 적당히 가까웠던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슬프지 않았다. 난민 문제, 총기 난사, 약자를 이용한 자살테러, 축산업의 잔인한 동물학대 세상은 슬퍼할 일로 가득하다. 그래서 무뎌졌겠거니 하고 살았다. 조금 우습기도 했다. 스펙타클로 가득찬 스크린 속 가상인물의 슬픈 운명에는 자주 공감했던 내가, 현실 속 인간들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꼴이라니. 이것이야 말로 수전 손택이 말했던 '타인의 고통' 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위 학생의 소식을 접할 때의 나는 좀 달랐다.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뒤의 맥락과 배경과 역사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던 교내문화, 점차 학생들간의 연대가 부족해져 가는 현상, 선배/후배/교수 라는 역할 속에서 마주했던 뒤틀린 권력권계. 희생과 그 이후 벌어진 갈등을 '관찰'하며 알았다. 꽤나 오랜 기간 속해있던 사회의 본 모습. 그리고 내가 했던 행동, 내뱉은 말, 그것들의 직간적접인 영향력을 모두 검토한 결과, 나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란 결론을 내렸다. 몇 년 전 이런 과정을 겪으며 달라졌다.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게 되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비판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몇 년 후 지금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변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공범'들이 세상에 많이 남아 있다. 진정으로 연대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가 '정준영 단톡방' 에 대한 제보를 위해 기자에게 직접 접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움직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프다. 최종범이라는 사람은 2019년 8월, 1심에서 협박, 강요, 상해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1년 6개월치 범죄를 저질렀지만 3년간 봐준다는 뜻이다. '리벤지 포르노'와 관련된 불법 촬영 혐의에 대해서는 "명시적 동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고 구 씨가 제지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몰래 촬영한 것이라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라는 이유로 무죄다. 현재 검찰과 최 씨 측 모두 항소하여 2심이 진행중이다. 사법부에는 기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을 막론하고 그들은 나름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조직으로 보인다. 두려운 점은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죄'를 분별하는 거대한 '권력기관'이라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선, 악을 분별하거나, 적어도 반인륜적인 행위는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겠지 라는 시민들의 막연한 기대는 토요일 저녁 쯤에 산 복권만큼이나 허망해 보일 따름이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모 언론사에 제보를 의뢰하며 최종범이 한 말이다. 맞다. 그는 실망시키지 않고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 모습 그대로 행동했다. 신체적 손상을 입혔고 동영상을 빌미로 고인을 협박했으며, 결국 무릎까지 꿇게 만들었다. 협박범은 아직 살아 숨쉬고 피해자는 떠났다. 분명히 우리 사회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기존의 남성성을 강조하는 문화와 사회 집단에서도 스스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보인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무릎 꿇고 제보하고 믿을 수 없는 무죄판결에 맞서 싸워야 최종범 같은 사람이 사라질지. 만약 우리 사회가 '동영상 속의 인물'에게 집중하지 않고 '동영상 유포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받게 하는 사회였다면 최종범은 감히 '연예인 인생 끝나게 해주겠다' 따위의 말을 내뱉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범이 속한 '사회' 속에서 나도 살아가고 있다.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0.1% 혹은 0.01% 정도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도 사회적 타살의 '공범'일 것이다. 이 힘없는 자백을 넘어 조금씩 움직이려 한다. 리벤지 포르노를 보지 않고, 또 주변에도 그러한 것을 권장하며, 인권을 말살하는 자료를 '유통, 소비, 생산' 하는 일체의 유, 무형의 시장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본능, 혹은 습관을 넘어 나와 같은 결정을 내려 주기를 바란다. 얼마 전 피해자의 동료가 애도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로가 연약함을 더 인정했으면 네게 좀 더 위로가 되었을까'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ddc7ca8e4b0d50f32957956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4203

https://www.bbc.com/korean/50527387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bd4c62e4b01470d0569abf

http://newsum.zum.com/articles/47666303

https://www.vop.co.kr/A00001450943.html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3571192&cloc=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19120276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