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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미스비헤이비어(2020) Misbehaviour








평점 7.8/10


평점은 상대값이므로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다. 한 노인이 어린아이가 치마를 입고 화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예쁘다고 칭찬한다. 아이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듯이 거울을 보고 제자리에서 돌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뒤늦게 귀가한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하루종일 아이를 맡긴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사과한다. 노인이자 큰 여성의 엄마는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큰 여성 때문에 집안이 망가져 가고 있다며 비판한다. 화가 난 여성은 당신처럼은 살 수 없다, 당신 남편에게 너무 순종적이었다, 엄마의 삶은 어디있냐, 엄마처럼 살 수 없었다고 한다. 노인이자 큰 여성의 엄마는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너와 우리집이 이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냐' 라며 반박한다. 큰 여성이 가사노동에 시간을 쏟을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권운동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어느 2세대 페미니스트가 겪었던 가정 내 갈등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영화는 70년 영국 미스월드 생방송에 잠입해 여성해방운동 시위를 펼쳤던 두 명의 여성과 그 대회참가자들과 우승한 여성을 조명한다. 대놓고 누구를 편들기 보다는 이런 일이 있었고 그 주인공들은 아직 살아 있으며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주된 메세지다. 몇 년 새 급속도로 부상한 여성인권 문제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다. 82년생 김지영은 입장에 따라 굉장히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선 '남의 나라' 에서 '예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접할 거라는 생각이다. 남성들에게 여성인권운동을 소개할 때 [맨박스]를 손꼽는 이유와 같다. [맨박스] 역시 한국사회의 현재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맨박스]는 미국의 여성인권운동을 중심으로 대다수 남성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권고를 담고 있다. 미국 흑인 남성이 미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의 남성들이 더 다가가기 쉬운 면이 있다.



여성 운동가이자 역사가 '샐리', 페미니스트 에술가 '조', 역사상 최초의 미스 그레나다를 각각 키이라 나이틀리, 제시 버클리, 구구바샤가 맡았다. 구구바샤는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실사판 영화에서 빗자루 플루메트를 연기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캐리비언의 해적, 비긴 어게인에 참여했다. 여성인권을 다룬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배우들은 비판을 받을지 모른다. 그 근거가 단순히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기 때문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새 자주 떠오르는 문장 혹은 대화가 있다. 언젠가부터 오랜 격언처럼 쓰이는 것이다. '나는 노인이라 모른다, 장사하는 사람이라 모른다, 서민은 잘 모른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해서 보통사람들은 신경쓰지 않게 해달라'. 이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슬픈 주장이다. 시민이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권리를 위임한 것과 권리를 포기하고 남에게 양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법적으로 권리를 양도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권한과 비용을 주고 대행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않다면 비판하고 교체할 힘은 시민에게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는 정치적이다. 그것을 외면하고 숨기고 감출수록 각자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개그맨이 정치를 해서 영화 감독이 정치색이 강해서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다양성과 언론의 자유는 무수한 잡음을 더 강하게 더 뚜렷하게 하는 장치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각자가 박자와 리듬을 선택하고 나와 어울리는 악기를 찾아가는 일이 정치다. 완벽한 하나의 이상을 쫓아 평화롭게 굴러가는 세상은 왕정이나 독재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개인이 욕망과 행복을 포기하고 하나의 악보와 소수의 지휘자, 작곡자들의 통제 아래 단조롭지만 편하게 사는 길을 인류는 가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정치색이 강해서 비판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한 키즈 유튜버가 화장품을 다루는 영상의 조회수가 20년 6월 기준 8209만회다. 이제 수많은 아이들이 할머니의 도움 없이도 거뜬히 화장을 해내는 시대가 왔다. 영화의 배경인 70년대로부터 5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양육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20년 넘게 애지중지 길러왔던 아이가 대뜸 내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것은 가슴 아픈 경험임에 틀림없다. 길러진 자들의 입장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왜 '내'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는 도리어 '나'를 부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라 말하는 양육자들을 길러진 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나 대신 가정을 택한 삶의 결과가 늘 행복한 것도 아니다. 


미스비헤이비어MISBEHAVIOUR-/나쁜 행동, 규칙을 파괴함/는 늘 논란의 대상이다. 미스비헤이비어는 무질서와 혼란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나름의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무수한 미스비헤이비어와 함께 해왔다. 현재도 홍콩과 미국에서 진행 중이다. 시민이라면 언젠가 한 번 쯤은 이런 일들에 가담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엮이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 예습으로 안성맞춤인 작품이다. 영화는 여성해방운동 시위를 계획 실행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시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시위를 구경하는 사람 등 총체적 관점을 담백하게 제시한다. 예민한 주제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연출이라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거나 갑자기 인생으로 깊숙하게 침입한 여러 이슈들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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